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무기력.. 그 끝은 어디인가...?


나는 이 단어만 들어도 힘이 쭉쭉 빠진다.

마력적이고도 블랙홀과 같은 이 단어는 나를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구멍에 무한히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가 그렇다.

아마도 정말 피곤하지 않기 때문에 잠이 안 오나보다.

편안한 침대에 누워있다보면, 생각의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나를 불편하고 슬픈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이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나가고 싶지만, 몸이 도저히 움직이질 않는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 처럼...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걸까?"와 같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맴돈다.

조급함만 남긴채,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다보면, 눈물도 흐른다.

눈물을 흘리다 지쳐서, 그렇게 꿈을 꾸고 잠을 자고, 계속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학습된 무기력은 시작되었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19세기 악덕



첫째가 권위주의이다. 이 사회는 아이들, 여성들, 노동자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둘째는 착취이다. 상류층의 신사 숙녀들은 노예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 그들은 윤리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당연시 여겼다.

셋째가 성과 인종 차별이다. 놀랍게도 이를 신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으로 여겼다.

넷째가 탐욕과 축재이다. 중산층의 덕목은 저축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

다섯째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니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 가족과 같이 대하라니, 그것은 가족에게 큰 실례가 될 것이다.



특히, 다섯번째 악덕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현대 사회는 "내 집은 내 성"의 태도가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사생활을 누릴 수 없는 데서 오는 무능력이 문제가 되었다.

반드시 타인과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긴 것이다.

결국, 현대는 19세기 중산층이나 상류층 개인주의, 자기중심주의의 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때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공동체"를 이루려면 자신의 자아를 넘어 타인의 자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와 너와 우리를 껴안는 책임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이 극단적 무력감은 대부분 신경증적 인성에서 발견된다.

무력감은 신경증 환자들에게 매우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마땅히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이런 무능력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약하고 무력하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다.



신경증적 환자는 어떤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세계 혹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특히, 태어났을 때 가진 기질적 특성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타인보다 똑똑한가? 예쁜가?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되고 스스로 답을 내리게 된다.

결국, 깊은 열등감을 결과로 얻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로 이어진다.



인정과 존중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무력감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당하건 정당하건 자신을 향한 모든 비난 비판을 감수하고 반론을 펼치지 못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부당한 비판, 비난에 대한 사실을 못 느끼고,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

이러한 모욕과 비하에서 무능력이 기인하는것이다.

어째서인지, 몇시간 혹은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비난이 부당하거나 모욕이 지나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한다.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가 자주 "외롭다" 느낀다면, 그것은 군중 속 고립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른다.

반면, 고독은 "혼자이기 때문에 비로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의미하지 않는가.

고독한 미식가라고 하지, 외로운 미식가라고 하지 않는다.

사실, 당사자가 "혼자인 상태"를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단어 어감 차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감정, 즉 정체감이 필요하다.

"자아"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미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 감정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그에게 거는 기대에 대한 반응? 자의식 과잉?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를 타인과의 관계 과정에서만 "나"로 느낄 수 있다.



타인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고립된 경우를 생각해보자.

안타깝게도 나는 정체성보다는 내 인격을 소유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나의 인격에 집착하는 "자아"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포로가 되버린다.

그들은, 정신적 감금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불행을 택하게 된다.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



또,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회피하지 않는 능력, 즉 성숙한 방어기제 또한, 중요하다.

오히려, 갈등을 최대한 피해야한다는 생각이 위험할 수 있다.

현대 교육은 부모가 아이에게서 갈등의 경험을 덜어주는 것이 목표가 되었지만, 이것은 오류이다.

"세상 편하게 자랐구나"라는 핀잔을 들어본적이 있지 않은가.

이것도 아이러니하게 갈등이 감동의 원천이며, 내면의 힘,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개발하는 원천이다.

갈등을 피하기만 하면,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는 믿을 수 있는 진짜와 순수 허울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이리저리 오간다.

모든 탄생에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 구절에서 나는 소설 "데미안"이 강렬하게 생각이 났다.)

놓아버릴 용기, 모든 안전을 버리고 떠나기,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을 믿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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