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될때

한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간다는것은 정말 힘들다. 왕따를 당해도 연약한 여자가 된다는것도 동성애자로 살아가는것도 여경으로 살아가는것도 여교사로서 아니면 유색인종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회사에서도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조금 특별하다는 이유로 살아가는것 자체가 논란거리가 되고 구설수가 되고 혐오감이 되기도 한다.

 

군중심리란 참 무서운것이다. 그들의 수군거리는 시선속에는 어떤 소수자(약자)에 대한 안타까움도 묻어나면서 동시에 혐오감도 표출한다. 내가 표준의 평균의(NORMAL) 사람이니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은 모두 틀린 사람이 되어 버린다. 틀린것과 다른것의 차이. 상당히 어렵다. 관심을 쏟아야될 대상이 나와 다르니 불편하고 힘든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한것은 어느새 나와 다른것이 아닌 내가 다수자니까 맞고 너는 소수자니 틀린것이 된다. 소수자로 살아간다는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그들은 사회집단에서도 인정받기 힘들지만 더욱 나아가 그들 스스로 또한 스스로를 인정할수 없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 그들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고 잘 살아보려고 해도 그것을 인정해주는 사람 또한 다수가 아닌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정말 너무 힘들게 삶을 살아간다. 다수자들은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직접 그들의 삶을 살아보지 않는한..

 

진지함이 싫다는 사람이 있다. 농담따먹기를 좋아하고 서로 아무렇지 않게 장난식으로 말하지만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수 있고 희롱이 될수도 있다. 그러면 그것을 말한 사람은 유머로 풀어가고 싶었는데 괜히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말한 사람은 정당성을 찾기 위해 "그런것도 못받아들이냐"는 식으로 또다시 폭력을 가하게 된다. 그들이 왜 진지함이 싫은지는 너무 이해가 간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까지 말을 조심해서 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평소에 진지하게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어차피 내 인생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의 인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정당한 권리이다. 아무래도 스스로 자존감이 높으려면 다른 사람의 상처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소수자들에게 관심을 쏟는것은 여간 에너지를 쏟는 행위가 아닐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에게 소수자의 생각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다만, 진정으로 통합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어떤 MAJOR의 문화만 맞다고 생각할것이 아니라 MINOR한 감성조차도 이해할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을 하기 위해서는 이미 생각이나 사고가 굳어진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그들은 여태까지 살아왔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지도 않을것이며 그것이 세상의 흐름일지라도 속으로는 저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가 된다. 그리고 차별하게 되고 이 역시 다수가 소수를 이길수 밖에 없는 군중심리로 흘러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엘리트 집단주의도 비슷하다. 똑똑한 사람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생각들로 세상을 바꾸어나가는것이 꼭 좋은것만은 아니었다. 그리스 로마시절에도 철인 정치, 엘리트 집단주의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나 그들은 의외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때가 많았다. 결국은 빠른 결정을 내릴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잘못된 답을 찾아갔을때는 또다시 항로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무조건 잘못된것은 아니지만 너무 맹신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만약, 모두의 생각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가고 싶다면 조금 느리더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정책을 결정하는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이상적인 생각이다. 또 어떤이들은 그렇게 느린 생각과 사고로 일을 처리하는것에 불만과 답답함을 토로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차별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것이 바람직할까. 흥미로운 사실은 최근 KKK단(백인 우월주의 인종집단)이 흑인을 단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생각보다 증오범죄는 흑인vs백인 끼리 이루어지기보다는 같은 인종 백인vs백인, 흑인vs흑인끼리 더 범죄율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더 친밀할것이고 그 친밀감속에서 서로 다른점이 발견되면 더욱 크게 느껴질것이고 그것이 범죄동기로 유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이것 또한 친밀감에서 비롯된 하나의 모순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 어느순간 증오(Hate)로 바뀌는것이 쉽듯, 서로간의 예의를 지킬줄 몰라서 생기는 하나의 현상일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를 바꾸려기보다는 인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깊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절대 할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교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종교적 사랑은 이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정말 고차원의 사랑으로 정의가 되니까. 다만, 사이비 종교처럼 잘못된 사상을 바탕으로 시작한 종교는 어쩌면 그 시작 뿌리부터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패러다임은 언제나 변한다. 인터넷이 발달되기전에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하고 실제로 일의 능률도 높았을지 모른다.(영업) 그리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것은 과거나 현재나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요소 스킬이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수전 케인의 콰이엇에서 이야기 하는 부분들을 보면 내향적인 사람들 또한 표현을 안하는것일뿐이지 세상에 도움되는 일들을 많이 하곤 했다. 다만, 그들은 오해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 내면에 갇혀서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유튜버가 유행하고 있는데 의외로 유튜버들 중에 내향적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평소 주변 사람들한테는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활용하여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을 쓰는 작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말도 잘하고 잘 놀줄도 알고 사람 비위도 잘 맞추고 분위기 메이커일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그것들을 정리해서 책을 내는법에는 더 익숙하지 않은 경우도 꽤많다. 그렇다고 해서 외향적인 사람을 폄하하는것은 아니고 이처럼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사실 각각의 특색과 장점, 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을뿐이다. 그래서 패러다임이 바뀔때 우리가 그 불편함을 얼만큼 받아들일수 있는가는 사실 "개방성"이라는 특색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혐오표현에 대한 개념 정의는 아래와 같다.

개념1.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이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

개념2. "반유대주의, 제노포비아, 인종적 증오를 확산시키거나 선동하거나 고취하거나 정당화하는 모든 형태의 표현 또는 소수자, 이주자, 이주 기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공격적인 민족주의, 자민족중심주의, 차별, 적대 등에 의해 표현되는 불관용에 근거한 다른 형태의 증오"

소수자는 역사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왔고 현재도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집단으로서 인종, 성별, 장애, 성적지향 등 고유의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집단 또는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을 뜻한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 혐오 표현을 조장하지 않는가. 어쩌면 합리화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만 정당화하려는 무지함에서 오는것이 차별이고 그것이 혐오라는 표현이 되는것과 같다.

 

랍스터를 산채로 삶는것은 불법이다. 모두 고등신경계를 갖고 있어 고통을 느낀다. 이것 또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직접 말못하는 랍스타가 되어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도 데이거나 베이거나 상처를 입어보면 그 고통이 아픔인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상상을 해보는것이다. 말못하는 동물 또한 마찬가지로 고통이나 슬픔을 느낀다고. 그렇기 때문에 동물 복지에 따라 도살시에는 최대한 고통을 줄여줄수 있는 방법을 택하자고 말이다. 그것이 어쩌면 우습게도 들릴지 모른다. 막상, 사회의 인간들 조차도 서로 공감 못하고 헐뜯고 욕하는 세상에 동물이나 신경쓰자니 기가 찰수도 있다. 하지만, 공감능력이 아예 없는 싸이코패스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리가 없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하여 남들의 고통엔 무관심하고 그저 재미로 살인을 저지를수도 있다. 이는 지극히 반사회적이고 위험하며 우리가 해결해야할 하나의 문제이고 숙제가 된다. 공감능력이 없으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다. 아예 생각조차 시도하지 않게 된다.

 

사실 이런일들은 차별을 지독하게 겪어보아야 발효되는것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홀로코스트 문제가 있다. 유대인 학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몇백만명이 가스실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학살 당했다. 제노사이드. 인종, 이념 등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것을 뜻한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로 혹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어떤 집단을 몰아가고 명분을 내세워 학살을 자행한다. 군중심리도 따라온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당시 유태인 학살에 관심을 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직접 차별받는 당사자가 되어봐야 그 억울한 심정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무지하고 역사를 또 반복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일찍이 '역사부정죄'를 도입하여 이러한 혐오표현을 자제한다.

 

우리나라에 증오차별법 같은것은 없지만 앞으로 공론화될 필요성은 있어보인다.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 또한, 가해자의 말을 들어보면 일종의 '여성혐오'적 사고가 녹아있는것을 확인할수 있으며 소수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위험에 시달린다. 심지어 스스로 이 세상에 살아있을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수 있다. 문제는 표현의 의도가 아니라 그 말의 표현이 어떤 당사자에게 불쾌감이나 혐오적 느낌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 기준은 명백히 애매하다. 누군가는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한 번 공론화가 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문제가 되었던 사건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민감하게 다루어져야할 필요가 있다. 여성 인권에 대한 차별을 언급하면서 공론화된것이 오히려 이제 남성의 역차별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례도 많다. 

 

세계 인권선언문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떤 차별도 없이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위배되는 그 어떤 차별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러한 차별에 대한 그 어떤 선동행위에 대해서도 똑같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것은 이미 1948년에 언급되었던 문구이다.

 

세계 각국의 혐오표현금지법, 혐오표현에 대한 국제적 합의는 꽤 높은 수준에 다다랐지만 한국이나 일본은 어떠한가. 중국을, 한국을 혐오하고 있는 부분에 있어서 혐오표현에 대한 사회적 인식수준은 매우 낮다. 사실 스스로가 깨끗하고 청렴하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보이지는 않는 상황이다. 스스로를 제대로 인식하고 혐오표현의 수준을 낮추는것은 세계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의 국격에 걸맞는 흐름이 될것이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는 어떠할까. 무조건 혐오를 금지하는것이 옳을까? 미국의 경우 혐오표현 금지법이 발효되어 있지만, 그 이전에 표현의 자유에 대한 법이 있다. 이것은 애매하다. 어디까지 표현의 자유를 챙기는것이 옳을까. 이 혐오적표현을 자연스럽게 해결할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 범위가 방대하기 때문에 인위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기존에 해왔던 혐오적 표현 토대 자체를 바꾸어가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동성애를 반대하는것" 자체가 표현의 자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발언" 그 자체가 자유로울수가 없다. 요즘처럼 인터넷 댓글로 모욕을 했을때 모욕죄가 성립되는 세상에 상대에게 모욕이 될수 있는 문구를 아무렇게 하는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고 의식 수준도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아직 동성혼에 대한 법은 없지만 요구할 권리는 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든 받아들여지지 않든 무조건적으로 반대한다는 생각은 차별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차별하지 않는 동등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면서 속으로는 혐오하고 있다니 이보다 모순적인것이 어디있겠는가.

 

혐오표현이 발생했을때 무시하거나 회피하는것은 바람직한 행동양식이 아니다. 분명,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해야 한다. 혐오 표현에는 대항 표현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척점에 서있지 않은 제3자(중재자)가 개입하여 소수자를 지지해줄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건강한 방향으로 발전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니까.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는것까지는 허용이 되지만 그를 빌미로 그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표현을 하는것이 바람직할수는 없는것이다. 또, 소수자이기때문에 소수자들만이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 문제를 수정, 개선할 여지가 필요해보인다.

 

아직도 한국은 혐오표현에 대해 갈길이 멀다. 혐오표현이 사회적 해악으로 어떻게 번질수 있는지를 검토해야하며 그것에 대한 관심들이 필요하고 법제정도 필요하다. 한국이 혐오의 확산에 취약한 이유는 군중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누군가의 주장에 쉽게 동조되고 비판적인 사고를 갖지 않는것 또한 혐오표현의 확산에 한몫을 한다. 흔히 말하는 뒷담화도 심하고 경쟁도 심하고 시기, 질투도 없는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소수자뿐아니라 시민들, 그리고 혐오 표현자들 사회, 국가가 나서서 이러한 인식 제고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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